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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실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실체의 현상이기도 하며 현상으로서 개념으로서 실제 한다. 그것들은 우리를 둘러싸며 존재하며 우리의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것은 모든 간격에 존재한다. 살아있는 것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활자와 활자 사이에도 존재한다. 그것들은 늘 방위처럼 따라 붙는다. 그리고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분위기, 뉘앙스, 느낌, 감정, 사유, 개념, 아우라, 경험, 생각, 우주의 암흑물질, 삶과 죽음까지. 대상이 갖는 겹겹의 사이에 존재하는 얄팍한 지금이 쌓여 단단한 관념이 된다. 지칭하는 대상보다 그 대상을 지탱하는 상념이 중요하다. 그것을 살펴보기를 원하며, 그것을 검은 무엇들로 그리고자 한다.

우리는 무엇일까. 왜 태어났으며 고된 여정을 거쳐 죽어가는 것일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우리가 있는 이 지구 외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 공허함은 경계를 부른다. 눈앞에 직면한 수많은 실체들 사이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암시를 가늠케 한다. 그렇게 떠올려진 암시들은 나로 하여금 회화로서 구술되고 기록된다. 내가 느끼는 검은 무엇들은 실재에서 실체를 제거한 뒤 남은 현상 그 자체이다. 평면 위에서 그림과 나는 형체가 사라지고, 그저 검은 암시들 사이에 갇혀 사로잡힌 커다란 재료일 뿐이다. 나로부터 밖으로 꺼내어진 그것들은 다른 누군가의 검은 무엇이 되기도 한다. 검은 무엇에는 경계나 구분이 없다. 단지 어렴풋이 있다는 자각일 뿐이다.



작가노트 쉬운글 해설
‘나’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요? 우리는 왜 살면서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게 될까요? 우리는 왜 죽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질문이니까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지지 못하는 것이라면 실제로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경험하지 못하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꼭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느끼는 기분이나 생각도 보거나 만질 수 없지만 실제로 있는 것이죠.
이 세상에는 기분, 생각, 분위기, 느낌처럼 내가 보거나 만질 수 없는 것이 가득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물건과 물건 사이에도, 글자와 글자 사이에도 있습니다.
 
작가는 실제로 있지만 보거나 만질 수 없는 것들의 의미를 ‘검은 무엇’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를 통해 ‘검은 무엇’을 표현합니다.
작가가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장지* 위에 목탄**만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무가 타고 남은 검은 덩어리인 목탄은,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보거나 만질 수 없지만 실제로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무가 불에 타 버리면 원래 나무의 모양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나무였다는 사실과 불에 탄 과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목탄으로 남아있습니다.
 
2019년부터 작가는 옷을 만들 때 사용하는 리넨*** 위에 기름과 물감을 섞어 만든 오일 스틱****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재료로 작업한 작품들도 목탄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검은 무엇’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검은 무엇’은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도 남아 있습니다.
‘검은 무엇’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이 전시에서 작가가 표현한 ‘검은 무엇’은, 작가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림 속 사람이나 사물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검은 무엇’이 옮겨갈 수도 있습니다.
작품을 보는 사람의 ‘검은 무엇’이 작품에 담길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도 ‘검은 무엇’이 있나요?
나의 ‘검은 무엇’은 어디에 있나요?
 
*장지 : 우리나라에서 만든 두껍고 질긴 하얀 종이.
**목탄 : 나무를 불에 구워서 만든 그림 도구. 얇고 긴 막대 모양으로 생겼다.
***리넨 : ‘아마’라는 식물의 껍질로 만든 천.
****오일 스틱 : 기름과 물감을 섞어서 색연필처럼 만든 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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